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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제 활동/MENA/정규 세미나 일지

[2012/10/11] 신한울, 김성주 학회원 발제: 꾸란과 여성(베일과 여성 할례, 꾸란에서 찾다)



[발제 주제] 


1신한울, 김성주 학회원 꾸란과 여성(베일과 여성 할례, 꾸란에서 찾다)


   ▶ 세미나 자료 링크 => http://naafidha.tistory.com/317






[5분 토크 내용] 


1. 덴마크에서 배를 보내 모로코의 여성들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추진
  (모로코는 법적으로 낙태가 불가능한 국가)
 - 모로코 정부는 항구를 막아버린다고 주장.
 - 덴마크의 여성 단체들은 많은 모로코 미혼 여성들이 유럽으로 와 낙태를 하는데, 실질적으로 사후 관리 등이 잘 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배를 보내 하는 것이 여성을 위해 긍정적인 처우라고 주장(샤리아가 엄격히 실행되는 일부 아랍권에서 미혼모는 명예 살인 - 투석형)

2. 그리스-터키 핫라인 개설
 - NATO 회원국이고, 군사적 대립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지므로
 - 터키와 그리스는 키프로스를 사이에 두고 역사적으로 앙숙.
 - 터키가 EU에 가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스와 키프로스 때문임.

3. 페르시아 만의 UAE와 이란 사이에 섬들이 있는데 그 중 아보우사 섬을 사이에 두고 
  두 국가가 영유권 분쟁 중.
 - UAE가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이란이 UAE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경우,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
 - 이 섬이 중요한 이유는 페르시아 만 통제권과 석유문제가 있기 때문임.
 - 이란이 핵 문제를 비롯해 현재 계속적으로 도마에 오르고 있어 UAE와 국제 사회의 눈길이 곱지 않음.
 - 이란 문제가 핵 문제와 얽혀 최근 더 복잡해지고 있음.

4. 미국은 이스라엘과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이란의 핵 문제를 막겠다고 함.

5. 현대 중공업이 사우디에서 화력 발전소 수주 확정.
 - 과거 중동에 노동자를 다수 파견했던 우리나라가 수주하는 국가로 발전한 데 대해 중동 지역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음.

6. 에어 아시아 항공을 비롯해 2개의 항공사가 테헤란으로 가는 항공기를 모두 중단하기로 결정함.
 - 서방국가들의 압력이 있었고, 이 항공편으로 얻는 이익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7. 이란의 화폐가치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대폭 하락하여 혼란, 불법 환전소도 기승을 부리고 있음.
 - 이란의 고위급 인사(정보통신부 장관, 이란은 특이하게 화폐 관리를 정보통신부에서 주관함) 청문회가 열림.
 - 이란 정부 입장에서는 안전한 금과 달러를 계속 매입하려고 함.

8. 시리아 항공기가 러시아로부터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시리아 항공기 안에 무기 적재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터키가 긴급 착륙시킴. 
 - 터키는 항공기 안에서 무기가 발견되었다고 주장, 그러나 외신들은 항공기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도함.
 - 시리아의 보복을 염려해 터키는 모든 터키 항공사들에게 절대로 시리아 영공을 지나가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음.
 - 이 사건에 대한 그리스 한 국민의 입장: 터키가 시리아 반군 단체에 무기를 주지 않았나. 터키의 이러한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9. 터키 총리가 아사드를 ‘목발 짚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 목발이 사라지면 그 지위가 다 무너질 것으로 예견함.
 - 현재 터키는 시리아와 대치한 국경에 더 많은 군사적 요소들을 배치하고 있음.
 - 터키의 합참의장이 국경 쪽으로 한 번이라도 폭격이 일어났을 시에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취하겠다고 발표.
 - 전면전 분위기로 치닫음.
 - 터키는 터키 대 시리아의 싸움이 아니라 NATO 대 시리아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고 하고 있음. NATO의 일원인 터키를 공격하는 것은 곧 NATO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는 맥락. 그러나 서방국가들은 일을 크게 벌이기를 원하지 않음.

10. 서울대에서 있었던 인남식 교수님의 강연 중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내용.
 - 터키 총리가 NATO 사무총장에게 시리아 문제를 이야기 했고,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긍정적 답장을 얻음.
 - 러시아는 시리아에 계속 무기 수출 중임.
 - 이란은 시리아와 동맹관계이므로 전시 지원할 것임.
 - 이스라엘 측은 조기 총선을 치루겠다고 주장. (강경 입장)
 - 롬니가 대선에서 이길 경우, 중동에 강경할 가능성이 높아짐. 
(오바마의 외교 정책 중 대 중동에 관한 정책들이 실패했다는 분석이 많았음. 오바마가 정책 방향을 동아시아로 옮겨 가는 반면 롬니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중동에 강경대응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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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토크 추가자료] 


 터키인들의 팽창은 곧 그리스인들의 영토 상실을 의미했다. 그리스어로 '해뜨는 곳' 이라는 뜻을 지닌 아나톨리아(Aνατολή)는 기원전부터 그리스인들의 식민지가 건설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이전부터도 아나톨리아와 에게해의 도서지방에 그리스인들의 정주지가 건설되어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군대가 동부 아나톨리아의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 군대를 무찌르고 난 후 터키인들의 아나톨리아로 쇄도하기 시작. 1453년 메흐멧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서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는 터키인의 수중에 떨어진다.

 메흐멧 2세는 이슬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비무슬림 신민들에게 보장해주는데,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의 권한을 비잔틴 시대 때보다 오히려 더 강화시켜 제국 내 그리스도교 신민들의 총대주교(겐나디우스)의 행정적 통제하에 묶어두려고 했다. p.74

 (버나드 루이스 p.67) 오스만 제국이 보다 신뢰할 수 있었던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신민인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 국가들과 외교적 교섭을 할 때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1821년 그리스 독립운동이 터져나오면서 제국의 마지막 통역관 스타브라키 아리스타르키가 반군과 공모한 혐의로 처형되고 난 후 번역할 사람이 없어 외교서신들이 쌓일 정도였다.

 그리스 독립운동이 시작되면서 1821년 무장봉기 때 그리스 남부의 모레아 지방에서 농민들이 터키들을 학살하자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한 응징으로 키오스 섬에서 2만 여명의 그리스 주민을 학살하고, 이스탄불에 있는 그리스정교 총대주교가 이를 교사했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는 일이 발생. 이를 두고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에 대한 탄압으로 간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1823년 영국의 외상 캐닝이 그리스 반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나서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파샤에게 모레아, 시리아의 통치권을 양도하겠다는 조건으로 해군의 힘을 빌리려 했다.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 함대가 그리스 반군을 분쇄하여 아테네가 다시 오스만의 영토로 귀속된다.

 1827년 7월 런던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그리스를 술탄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치국으로 한다는 案을 내놓고 그리스는 이에 동의한다. 10월 영국이 빠지고 러시아와 프랑스가 오스만과 이집트 함대를 나바리노 해전에서 격퇴했고, 특히 러시아는 1828년 4월 러-오스만 전쟁에서 승리하며 1829년 9월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체결해 도나우강 하구, 코카서스가 러시아로 할양되며 몰다비아, 왈라키아 및 그리스가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영국의 러시아어 거둔 성공에 자극을 받았으며, 프랑스 또한 러시아의 지나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영국에 힘을 실어주게 되어 英, 佛. 러 3국은 1832년 5월 런던회의의 협상테이블에 앉게 되며, 그리스의 독립을 승인한다. 왕조국가로 출발한 '신생 그리스'는 바바리아公 오토가 국왕으로 즉위한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영토적 손실을 입게 되는데 파리강화회의의 결과로 술탄 메흐멧 6세에게 강요된 세브레 조약(1920년 8월)의 결과 이스탄불과 그 주변의 협소한 영토를 제외하고, 모든 유럽영토가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즈미르가 그리스에게 넘어가고, 동부 아나톨리아에 독립국 아르메니아와 자치국 쿠르디스탄이 생기게 된다. 이스탄불에도 영국 군대가 주둔하며 제국의 재정을 연합군이 간섭하게 되었으며 남부 아나톨리아에도 프랑스와 이탈리아게 통제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조약이 터키인들의 민족감정에 불을 지펴 저항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서구 열강들의 침입을 그리스인들의 침입과 동일시했다. 제국이 열강들에 의해 찢겨나갈 조짐을 미리 간파한 무스타파 케말이 주도한 권리보호연합회(Müdafaa i Hukuk Cemiyetleri)가 발족되고, 1919년 7월 케말이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휴전선 내 모든 오스만-이슬람 영토를 보존하고 제국을 법률적, 재정적 속박으로부터 해방한다는 국민헌장(Misaki Milli)을 반포한다. 케말은 독립전쟁을 이끌어 동부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 영토를 분쇄하고, 1921년 Ismet Pasha가 이끄는 군대가 앙카라 부근의 사카리야(Sakarya)까지 진격해 들어온 그리스 군대를 격퇴하며, 1922년 9월 9일 그리스 군을 추격한 끝에 바다로 내쫓고 이즈미르를 탈환한다. 결국 10월 11일 무다니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이스탄불과 트라키야에서 오스만의 통치권이 회복되었다.

 11월에 체결된 로잔 조약에 따라 열강들의 영사특권이 폐지되고, 터키 그리스 양계 민족 교환협정이 체결되는데, 이스탄불 거주 그리스인과 그리스 내 트리키야에 사는 터키인은 이에 제외되어 엄청난 민족 대이동이 초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위협이 급증하는데 터키인들은 이를 200년 이상 지속되는 러시아인의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1947년 NATO에 가입하여 그리스인들과 같은 안보협약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라크, 시리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터키가 양쪽에서 위협을 받게되자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맺어 위기에 대응한다.

 그리스 와의 관계는 원만하게 진행되다가 1963년 키프로스 문제로 악화되는데 키프로스는 1570년 5월 오스만 영토로 편입되고 나서 1878년 영국의 군사기지로 조차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속령이 된다. 1960년 8월 독립 이후 런던 협정에 따라 대통령은 그리스계, 부통령은 터키계가 맡게되는데 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내각은 그리스계 7석, 터키계가 3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인구구성은 그리스계가 77%, 터키계가 23%인데 양자가 반목이 극심했다. 1963년 11월 마카리오스 대통령이 부통령의 거부권 제한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제출하며 갈등이 극에 달했고, 1974년 싸이프러스병합운동(ENOSIS)지도자가 정부전복 위한 쿠데타를 감행 그리스인 중심의 키프로스를 건설하려 시도하자 1974년 7월 20일 터키가 4만 명의 병력을 투입 군사개입을 통해 키프로스 영토의 약 40%에 달하는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1975년 2월 13일 개별정부를 선포했다. 1983년 11월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Turkish Republic of Northern Cyprus)가 국제사회의 승인없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 이준영 학회원 제공


* 참고자료
  버나드 루이스. 『무엇이 잘못되었나』. 서정민 역(나무와 숲, 2002)
  Roderic Davison. 『터키사 강의』. 이희철 역(펴내기, 1998)
  Lewis, Bernard. The Middle East: a brief history of the last 2,000 years. Newyork; Scriber, 2003.
  McCarthy, Justin. The Ottoman Turk. Edinburg. Longman, 1997.







[세미나 사진] 







연합중동학회 "엘-네피제"
El-Naafidha Student Group for Middle East Studies